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양양하던 품으로 보아서 응당 신바람이 날 일이었다.  그런데 웬일인지, 여태까지 간
드러지게 웃고만 있던 홍백 아가씨가, 도리어 멍청히 넋을 잃고 한편에 우두커니 서
있을 뿐이었다.  땅바닥에 나자빠져 있는 지걸의 시체를 시름없이 내려다봤다. 가엾
고 딱하다는 기색이 아가씨의 얼굴 전체에 분명히 감돌고 있었다.  사람을 잔인하게 죽
여 놓고 나서, 가엾고 딱하고 불쌍한 생각이 들다니? 이것은 확실히 괴상한 심리 상태
가 아닐 수 없다. 그러나 이 순간에 있어서 복잡하게 갈피를 잡을 수 없는 홍백 아가씨
의 심정을 알아 줄 사람은 넓은 천지에 하나도 없었다.  아가씨는 입 밖에 내서 말을하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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지는 못했다. 그러나 마음속으로 혼자 중얼댔다.  ‘나를 원망하지 마라! 나는 명령을 받
들고 행동한 것뿐이다! 내가 이런 잔인 무도한 짓을 하지 않는다면, 명령을 거역한 게
되니까‥‥‥ 아!’  아가씨는 한참 동안이나 넋을 잃은 채 우두커니 서서 시체만 내려다보고
있었다.  그러나 다음 순간, 새빨간 그림자가 번갯불처럼 번쩍 했다. 홍백아가씨의 몸은
눈 깜짝할 사이에 어디론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.  아가씨가 사라진 뒤, 사방에는
또다시 무겁고도 매서운 정밀(靜謐)만이 감돌았다.  달빛조차 이 처참한 광경을 그대로
보고 있을 수 없다는 듯, 서쪽산봉우리 저편으로 그 밝고 둥근 얼굴을 서서히 감추고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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있었다.  숲속에서는 가지가지 새들의 울음소리가 구슬프게 들려 왔다.  새벽녘 안개가
차츰차츰 짙어졌고 날이 밝기를 재촉하는 닭의 울음소리가 요란스럽게 조용한 공기를
흔들었다.  아련하게 닥쳐오는 새벽녘 서광 속에서, 한 그루 굵은 나무에 지걸이 죽기
전에 마지막 손가락의 힘으로 새겨 놓은 몇 자의 글씨가 옴푹 패어 들어간 채 뚜렷이
드러나 보였다.  천하제일방은 무예계를 피로 씻어 버릴 작정이다. 점창파 사걸은 경고
를 남겨 놓고 간다.  (天下第一幇將血洗武沐, 默蒼四偈遺警)  그 굵직한 나무 밑에는 지
걸 동방복의 시체가 조용히 누워 있었다.   세상의 어떤 사람도 믿을 수 없는 사실이었다.
그렇게 명성이 쟁쟁하던 점창파의 사걸, 일류 고수급 인물들이 넷씩이나 눈 깜짝할 사이
에 천하제일방의 일개 취우사자의 손에 모조리 숨지고 말다니 ‥‥‥‥  비단, 무예계 사람들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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만이 아니라 사걸 본인들도 홍백 아가씨가 나타났던 순간에, 이런 결과는 꿈에도 생각지
못했을 것이다.  그런데 공교롭게도 때를 같이하여, 사걸들이 죽어 자빠진 곳에서 몇 리
떨어지지 않은 지점에서, 무예계에서 드물게 보는 일장의 치열한 결투가 전개되고 있었
다.  벽안승을 일격에 거꾸러뜨린 그 복면을 한 청년이 막 숲속으로 몸을 날려 들어섰을
때, 그의 귓전을 스치는 가벼우면서도 이상한 음향이 있었다.  내공(內功)이 능통한 경지에
도달한 사람은, 옆에서 바스락만 해도 그 음향을 판단해 낼 수 있을 만큼 예리한 청각을
지니고 있는 법이다.  깊은 밤, 조용하고도 넓은 벌판‥‥‥‥ 거기서 들려 오는 가느다란 음
향은 너무나 또렷했다.  복면을 한 청년은 몸을 비호같이 날려서 단숨에 음향이 들려 오는
곳으로 달려갔다.  그 가볍고 가느다란 음향은 한편 언덕 위에서 들려 왔다. 언덕 위에는
하늘을 무찌를 듯 뻗어 올라간